“그리운 건 김치찌개가 아니라, 그 김치찌개를 끓여주던 사람이었어요.”
미국에 온 지 1년이 조금 넘었어요. 처음 몇 달은 모든 게 신기했어요. 넓은 하늘도 좋았고, 야자수도 좋았고, 마트에 가득한 낯선 물건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감정이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갑자기 한국이 그리워지는 순간들.
꼭 특별한 날이 아니에요. 오히려 아주 평범한 날이에요. 비가 오거나, 아이가 아프거나, 혼자 점심을 먹거나. 그런 사소한 순간들에 마음 한구석이 조용히 시큰해져요.
비 오는 날이면 생각나는 김치찌개
캘리포니아는 비가 자주 오지 않아요. 그래서 오랜만에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면 이상하게 김치찌개가 생각나요.
친정 엄마가 끓여주시던 김치찌개. 두툼한 돼지고기와 푹 익은 김치. 짭조름한 국물에 밥을 말아 먹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던 저녁.
H마트에서 김치를 사 와 똑같이 끓여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따라 해도 그 맛이 안 나더라고요.
처음엔 재료 때문인 줄 알았어요. 김치가 달라서 그런가. 물 때문인가. 냄비 때문인가.
근데 어느 날 알았어요. 맛이 다른 게 아니라, 사람이 빠져 있었던 거예요.
“더 줄까?” 하며 국자를 들던 엄마.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던 가족. 그날의 공기. 그날의 소리. 그 모든 게 김치찌개 안에 들어 있었어요.
시차가 가장 멀게 느껴지는 날
한국과 캘리포니아는 멀어요. 비행기로 열 시간. 그런데 어떤 날은 그보다 훨씬 멀게 느껴져요.
친정 엄마가 병원에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어요. 당장 전화하고 싶었어요.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어요.
근데 한국은 새벽 세 시. 전화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카카오톡 창만 바라봤어요.
한국에 살 때는 몰랐어요. 멀리 산다는 게 단순히 거리가 아니라는 걸. 필요한 순간 곁에 갈 수 없다는 무력감이라는 걸.
아이가 아플 때
아이가 열이 39도까지 올랐던 어느 밤. 그날은 정말 한국이 사무치게 그리웠어요.
한국이었다면 소아과 문 열리는 시간을 확인하고 바로 달려갔을 거예요. 근데 여기서는 보험을 확인해야 하고, 예약을 잡아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고민해야 해요.
새벽에 아이 머리에 찬 수건을 올려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엄마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약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고, 뭘 해결해주는 것도 아닐 텐데. 그냥 한 사람. “괜찮아.” 라고 말해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른이 되면 다 괜찮아지는 줄 알았는데. 엄마는 몇 살이 되어도 엄마가 필요하더라고요.
한국 편의점이 그리운 이유
의외로 한국 편의점도 많이 생각나요. 새벽에 슬리퍼 끌고 나가 컵라면 하나 사고. 삼각김밥 하나 들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 시간. 별것도 아니었는데 참 좋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편의점이 그리운 게 아니었어요. 아무 계획 없이도 움직일 수 있었던 자유가 그리웠던 거예요.
익숙한 동네. 익숙한 골목. 익숙한 언어. 아무 설명 없이도 이해받을 수 있었던 일상.
수다의 거리
한국에 있을 때는 몰랐어요. 친구를 만나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이었는지.
갑자기 전화해서 “커피 마실래?” 한마디면 됐거든요.
근데 미국에서는 만남에도 계획이 필요해요. 아이 픽업 시간. 남편 퇴근 시간. 운전 거리. 모든 걸 계산해야 해요.
그래서 가끔은 친구와 세 시간 동안 별 의미 없는 이야기를 하던 그 시간이 너무 그리워요. 그땐 평범한 하루였는데. 지금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풍경처럼 느껴져요.
그리움도 정착의 일부였어요
처음엔 이런 감정이 부끄러웠어요. 미국에 오고 싶다고 그렇게 말해놓고. 왜 아직도 한국을 그리워하지? 왜 아직도 흔들리지? 스스로를 다그쳤어요.
근데 이제는 알아요. 그리움은 적응 실패가 아니에요. 사랑했던 시간의 흔적이에요.
한국에서의 삶이 행복했기 때문에. 가족과 친구가 소중했기 때문에. 그 골목과 냄새와 계절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리운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그 마음을 밀어내지 않아요. 한국을 사랑한다고 해서 미국을 덜 사랑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두 나라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두 개의 집이 있는 거예요.
📝 Julia Life Note
“그리워한다는 건 그만큼 사랑했다는 뜻이에요.” 미국 생활 1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어떤 날은 마음이 시큰해져요. 그럴 때마다 이제는 스스로에게 말해요. 괜찮다고. 그리운 건 당연하다고. 한국을 품은 채 미국을 사랑해도 괜찮다고. 우리는 지금 두 개의 계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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