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캘리포니아는 조용한데, 이상하게 마음은 조금씩 흔들리는 계절이에요.”
오후 두 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남편도 출근하고 나면 집 안에 오롯이 저 혼자 남아요. 오전 내내 돌아가던 세탁기 소리도 멈추고, 식탁 위에 놓인 컵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시간.
오전의 분주함은 조금씩 가라앉고, 아이들 픽업 시간까지는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아 있어요. 그 사이의 시간.
이상하게도 하루 중 가장 조용한데, 가장 많은 생각이 찾아오는 시간이기도 해요. 오늘은 그 오후 두 시의 풍경과 마음을 그대로 적어보려고 해요.

커피 한 잔의 무게
요즘 오후 두 시에는 커피를 한 잔 내려요.
한국에서는 아메리카노를 사 마시는 게 일상이었는데, 미국에 와서는 집에서 직접 내려 마시는 시간이 더 좋아졌어요. 코스트코에서 산 원두 한 봉지로 한 달을 버티는 단순한 생활인데, 이상하게 그 단순함이 마음까지 가볍게 해줘요.
머신 소리가 천천히 멈추고, 따뜻한 머그컵을 들고 식탁에 앉으면 그제야 하루가 잠시 멈추는 느낌이 들어요.
한국에 있을 때는 이런 멈춤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 누구의 팀원. 늘 누군가의 역할 안에서만 살았던 시간들.
그때의 저는 멈출 줄 몰랐어요. 멈추면 뒤처지는 줄 알았거든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멈춰서야 보이는 풍경이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던 것 같아요.
5월의 풀러턴
캘리포니아의 5월은 한국의 5월과 조금 달라요.
풀러턴 거리를 운전하다 보면 자카란다 나무에 보라색 꽃이 피기 시작해요. 햇빛 아래에서 보면, 마치 하늘색과 보라색 사이 어딘가를 걸어가는 기분이 들어요.
하늘은 거의 매일 맑고, 공기는 가볍고, 바람은 건조해요.
깨끗하고 예쁜 풍경인데, 가끔 이상하게 한국이 떠오를 때가 있어요.
한국의 5월에 있던 것들. 어버이날 카네이션. 동네 빵집에서 풍기던 빵 냄새, 예쁘고 달달한 디저트. 퇴근길 지하철 앞 작은 꽃집. 그리고 봄철이니 봄비 내리기 전 조금 눅눅했던 그 공기.
예전에는 이런 생각이 들면 괜히 더 슬펐는데, 요즘은 조금 달라졌어요. 그리운 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마음 안에 같이 살아가는 거라는 걸 알게 됐거든요.
여기 5월의 보라색 길 위에도, 한국의 그 5월이 같이 걷고 있는 거예요.
다이어리 한 페이지
요즘 오후 두 시에는 다이어리를 펴요.
예전처럼 일정표를 적지는 않아요. 오늘 해야 할 일보다, 오늘 느낀 마음을 적는 시간이 됐어요.
오늘은 이렇게 적었어요.
“아들이 어제 학교에서 친구랑 영어로 처음 농담을 했다고 했다. 별일 아닌 것 같은데 운전하다가 왠지 모를 감동이… 그동안의 시간이 스쳐 지나가면서.”
한 줄이면 충분해요. 그리고 감사일기를 쓰는게 좋다고해서 그것도 실천 중이긴 해요.
한국에서는 다이어리가 계획 도구였다면, 지금은 기억을 붙잡는 도구가 된 것 같아요.
1년 뒤에 다시 펼쳐보면, 오늘의 내가 얼마나 낯설고 또 얼마나 소중하게 느껴질지 궁금해요.
요즘 가장 자주 떠오르는 질문
요즘 오후 두 시에 가장 자주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요.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미국 생활 1년. 아직도 이 질문은 자주 찾아와요.
아이들 영어는 괜찮은지. 내가 집안일 속에 너무 흐려지고 있는 건 아닌지. 15년 동안 쌓아온 커리어는 어디쯤 가고 있는 건지.
답은 아직 없어요.
그래도 요즘은 그 질문을 예전처럼 크게 만들지 않으려고 해요.
재무팀에서 오래 일하면서 배운 게 하나 있거든요. 큰 숫자는 잘게 나눠야 보인다는 것.
그래서 “잘 살고 있나?” 대신,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이번 주에 웃은 일이 있었는지. 작은 숫자로 나눠서 보기 시작했어요.
그러면 이상하게 답이 조금씩 보여요. 오늘 아이가 한 영어 농담 한 줄, 그것만으로도 이번 주는 충분히 잘 산 거예요.
이번 달의 작은 다짐
이번 달 오후 두 시의 다짐은 두 가지예요.
첫째, 조급해하지 않기. 1년 차 주재원 아내는 1년 차의 속도가 있는 거니까.
둘째, 나만의 30분 지키기. 청소도, 빨래도, 카톡도 잠시 미뤄두고 오직 나를 위해 쓰는 시간.
생각보다 작은 시간인데, 이 30분이 하루를 다르게 만들어요. 픽업하러 가는 길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거든요.
📝 Julia Life Note
“오후 두 시는 누구의 시간도 아닌, 오직 내 시간이었어요.” 엄마이고, 아내이지만 하루 중 한 번쯤은 그 역할 밖에 있는 나를 만나야 한다는 걸 요즘 배우고 있어요. 커피 한 잔, 다이어리 한 페이지, 그리고 창밖의 5월. 그 정도면 다시 시작하기엔 충분하더라고요.
🔗 함께 보면 좋은 글
#오후두시의기록 #마음의기록 #주재원아내일상 #캘리포니아일상 #풀러턴 #오렌지카운티 #한국엄마미국생활 #감성에세이
Pingback: 오후 두 시의 기록 08. 하루가 두 번 시작되는 사람 - By Jul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