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늘 ‘빨리, 조심해, 다시 해’를 입에 달고 살던 엄마였어요. 그런데 미국에 온 지 1년이 지난 지금, 제 입에서 가장 자주 흐르는 말은 낯선 영어 한마디예요. 바로, It’s okay(괜찮아).예요.”
미국에 오기 전에는 몰랐어요. 아이가 컵을 떨어뜨리면 “조심하지 그랬어!”가 먼저 나갔고, 숙제를 틀리면 “다시 제대로 해봐”라며 다그쳤고, 무언가 늦어지면 “빨리빨리”라며 발을 동동 굴렀어요.
하지만 이곳에서는 이상하게도 마법 같은 이 한마디가 먼저 튀어나와요. 아이가 엉뚱한 영어를 해도, 우유를 바닥에 쏟아도, 심지어 제가 운전하다 길을 잘못 들어 넓은 길 한복판에서 헤맬 때도 스스로에게 나직하게 속삭여요. “It’s okay…” 처음엔 그저 흔한 미국식 인사치레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알게 됐어요. 이 말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이국땅 구석구석에 공기처럼 깔린 다정한 문화이자 사람 냄새였다는 걸요.

1. 3월 학부모 상담, 선생님이 건넨 위로
이 말의 진짜 온기를 또렷하게 체감한 곳은 아이들의 학교였어요. 지난 3월, 담임 선생님과의 학부모 상담(Parent-Teacher Conference) 자리에서 저는 마음속 깊은 불안을 털어놨어요.
“아이가 집에서는 영어를 거의 안 쓰려고 해요. 겉으로는 적응한 것 같은데 영어가 정말 늘고 있는 건지 매일 조바심이 나요.”
제 걱정 어린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던 선생님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집에서만큼은 아이가 편하게 모국어를 쓰게 하세요. 영어는 그저 시간문제일 뿐이에요. 학교에서 매일 부딪히며 조금씩 자라날 테니까요. 두 가지 언어를 품을 수 있다는 건 아이 인생에 정말 큰 축복이에요. 집에서까지 영어를 강요하며 스트레스를 주지 마세요.”
‘빨리 따라잡아야 한다’며 부족한 점만 세어보던 한국 엄마인 저와 달리, 선생님은 우리 아이가 ‘이미 가진 자산(한국어)’을 먼저 귀하게 봐주셨어요. 결과보다 과정을, 결핍보다 채워진 것을 먼저 짚어주는 그 순서가 가슴 먹먹하도록 고마웠어요.
실제로 아이가 수업 중에 영어로 엉뚱한 답을 말했을 때도, 선생님은 단 한 번도 고개를 젓지 않고 이렇게 격려해 주신대요. “That’s okay, good try!” 정답을 맞히는 것보다 낯선 언어로 문장을 뱉어낸 ‘시도’ 자체를 안아주는 다정함이 아이를 자라게 하고 있었어요.
2. 마트 환불 창구에서 마주한 뜻밖의 여유
실수해도 정말 괜찮다는 문화는 의외로 일상적인 마트 계산대나 환불 창구에서 매일 묻어나요. 미국에 와서 가장 놀란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환불 시스템이에요. 한국이었다면 망설였을 일도 이곳에서는 너무나 쉽게 해결되곤 했어요.
코스트코나 타겟(Target)에서 물건을 바꿀 때, 직원들은 늘 환한 얼굴로 “No problem at all(아무 문제 없어요)”이라고 말해요. 한국에서는 환불을 요청할 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서두르곤 했는데, 여기서는 부끄러워할 틈조차 주지 않아요.
잊지 못할 일이 하나 있어요. 학기 초, 아이 학교 준비물을 잘못 사서 바꿔야 했는데, 하필 아이가 그새 포장 케이스의 종이를 다 찢어버린 뒤였어요. ‘이렇게 뜯어진 걸 과연 바꿔줄까…’ 싶어 잔뜩 주눅이 든 채로 조심스럽게 물었어요. 그런데 직원은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흔쾌히 환불해 줬어요. 포장이 뜯겼는지 아닌지보다, 손님이 곤란해하지 않는 것을 먼저 챙기는 그 태도에 마음이 놓였어요.
셀프 계산대에서도 그랬어요. 저는 물건을 다섯 개 미만으로 살 때는 셀프 계산대를 이용하는데, 처음엔 손이 서툴러 바코드를 두 번 찍는 실수를 하고 말았어요. 화면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헤매고 있을 때, 멀리서 지켜보던 직원이 먼저 다가왔어요. “It’s okay, 제가 수정해 드릴게요.” 짜증 한 톨 없이 차분하게 화면을 고쳐주고, 끝까지 친절하게 지켜봐 줬어요.
이 모든 건 단순히 매뉴얼에 적힌 친절이 아니었어요. 눈앞에 서 있는 서툰 외국인 손님을 긴장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이자 온기였어요.
3. 놀이터와 이웃들이 가르쳐준 마음의 날씨
동네 놀이터에 가도 미국 엄마들의 시선은 조금 달라요. 아이가 흙바닥에 쿵 하고 넘어져 제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면, 곁에 있던 현지 엄마가 먼저 호탕하게 웃으며 제 어깨를 다독여요.
“He’s okay! Kids are tough!” (괜찮아요! 애들은 생각보다 단단해요!)
과장되게 걱정하며 아이를 나약하게 만드는 대신, 툭툭 털고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조용히 기다려 줘요.
이웃들과의 약속도 마찬가지예요. 예상치 못한 일로 조금 늦을 것 같아 미안함이 가득 담긴 문자를 보내면, 돌아오는 답장은 언제나 한결같아요. “No worries, come whenever.” 캘리포니아 이웃들이 툭툭 던지는 이 슴슴한 여유는 점차 닮아가고 싶은 삶의 태도가 됐어요.
“It’s okay”가 제게 남긴 작은 해방감
시간이 흐를수록 이 한마디가 제 마음에 가져온 변화는 꽤 컸어요.
- 괜찮다는 말은, 누군가의 실수를 기꺼이 품어주겠다는 다정한 허락이에요.
- 조금 늦거나 서툴러도 인생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다독여 주는 안전망이에요.
- 그리고 무엇보다, 그동안 채찍질만 해왔던 ‘나 자신’에게 가장 먼저 건네야 할 위로였어요.
미국 정착 초반에는 정말 매일이 실수의 연속이었어요. 은행과 관공서 서류를 엉망으로 적고, 드라이브스루에서 주문을 엉뚱하게 하고, 길을 잘못 들어 프리웨이를 빙빙 돌 때마다, 한국에서의 제 모습이었다면 자책하며 스스로를 다그쳤을 거예요.
하지만 이 동네 사람들은 제가 서툴 때마다 약속이라도 한 듯 “It’s okay”를 건넸고, 그 다정한 음성을 매일 샤워하듯 듣다 보니 어느새 저도 저 자신에게 관대해지기 시작했어요. “괜찮아, 미국은 처음이잖아. 그럴 수 있어.” 하고 말이죠.
이제 막 미국 생활을 시작한 엄마들에게
만약 지금 낯선 미국 땅에 막 도착해 모든 것이 두렵고 막막한 정착 초기를 지나고 계신다면, 이 말을 꼭 품에 안겨드리고 싶어요.
첫 1년은 실수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요. 마트 줄을 잘못 서고, 영어가 막혀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되묻는 일상이 반복될 거예요. 하지만 겁먹지 마세요. 이곳의 평범한 이웃들은 외국인의 서툼에 아주 오랜 시간 길들여져 있고, 기꺼이 기다려 줄 준비가 되어 있어요.
영어가 막힐 때는 그저 환하게 웃으며 이 한마디면 충분해요. “Sorry, my English is limited. Can you help me?” 그럼 눈앞의 미국인은 백이면 백, 한없이 다정한 미소와 함께 이 한마디로 당신의 긴장을 무장 해제 시켜줄 거예요.
“It’s okay! Don’t worry about it!”
📝 Julia Life Note
“It’s okay는 단순한 영어 단어가 아니라, 제가 이곳 캘리포니아에서 배운 가장 아름다운 삶의 태도였어요.” 한국에서 12년 동안 숨 가쁘게 달리며 늘 완벽과 속도를 요구받았던 저에게, 이 한마디는 마음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해 준 작은 해방구였어요. 실수해도 괜찮다고, 조금 느리게 가도 풍경은 여전히 아름답다고 말이죠. 이제는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매일 성실하게 살아내고 있는 나 자신에게 이 말을 가장 먼저 선물해요. “오늘 하루도 참 고생 많았어. 조금 서툴렀어도, 다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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