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두 시의 기록 08. 하루가 두 번 시작되는 사람

“첫 번째 하루는 엄마로 시작되고, 두 번째 하루는 비로소 나로 시작돼요.”

아침 7시.

우리 집 하루는 늘 조금 정신없이 시작돼요.

큰아이는 알람 한 번이면 눈을 뜨는데, 작은아이는 꼭 세 번은 깨워야 해요. 부스스한 얼굴로 식탁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보며 아침밥을 챙기고, 물병을 챙기고, 숙제가방을 다시 확인해요.

아침은 늘 정신없어요.

매일 같은 풍경인데도 이상하게 매일 조금씩 달라요.

오늘은 작은아이가 양말 한 짝을 못 찾았고, 어제는 큰아이가 물병을 두고 나갔고, 그저께는 둘이 사소한 걸로 티격태격했어요.

그렇게 정신없이 흘러가던 시간이 학교 앞에 도착하면 갑자기 멈춰요.

저희 집은 학교가 가까워요.

걸어서 5분 정도.

요즘은 일부러 걸어서 데려다줘요.

아침 햇살 아래에서 아이들 손을 잡고 걷는 그 몇 분이 좋아서요.

학교 앞에서 아이들이 친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뛰어가는 순간.

“엄마, 다녀올게!”

그 말을 듣고 돌아서는 순간이 있어요.

친구들이 없을 땐 뽀뽀도 해주고 하는데.. 친구가 있음 쑥스러운가 봐요 아쉬움이 있지만 커가는 과정이겠죠?

아이들이 교실 쪽으로 사라지고 나면, 저는 곧장 집으로 가지 않아요.

요즘은 돌아오는 길에 동네 공원을 한 바퀴 돌아요.

아침 공기는 아직 조금 차갑고, 햇살은 나무 사이로 낮게 들어와요.

그 길을 천천히 걷는 동안, 조금 전까지 ‘엄마’였던 제가 조금씩 ‘나’로 돌아오는 게 느껴져요.

누구도 챙기지 않아도 되는 그 십 분이, 저에게는 하루 중 가장 조용한 선물이에요.

그 선물을 받고 나면, 비로소 집으로 돌아갈 준비가 돼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는 순간.

이상하게도 저는 늘 그때 같은 생각을 해요.

아, 이제 내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조금 전까지 시끄럽던 집은 갑자기 조용해져요.

세탁기 소리도 멈추고,

식탁 위 컵도 움직이지 않고,

방금 전까지 뛰어다니던 발소리도 사라져요.

처음 미국에 왔을 땐 이 고요함이 참 낯설었어요.

조용한 집이 외로웠어요.

한국에서는 늘 누군가 있었거든요.

점심 같이 먹을 동료도 있었고,

퇴근 후 만나던 친구도 있었고,

엄마에게 습관처럼 전화하던 시간도 있었어요.

근데 여기서는 갑자기 모든 소리가 멈췄어요.

처음엔 그 침묵이 너무 커서 괜히 TV를 켜놓기도 했어요.

근데 이상하게 시간이 지나니까 조금 달라졌어요.

이제는 현관문을 닫고 커피를 내리는 그 시간이 좋아졌어요.

머신 소리가 끝나고 식탁에 앉으면

그제야 숨이 한번 쉬어져요.

그리고 생각해요.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내볼까.

누가 정해주지 않는 하루를, 오랜만에 제가 직접 골라요.

오전 시간은 대부분 책상 앞에서 보내요.

저는 한국에서 12년 넘게 재무팀에서 일했던 사람이에요.

숫자와 마감에 둘러싸여 살아서 그런지, 가만히 있는 걸 잘 못 해요.

그래서 지금도 이런저런 일들을 손에서 놓지 않아요.

블로그에 글을 쓰고, 제 이름으로 시작한 일을 들여다보고, 미국 생활에서 새로 배운 것들을 정리해요.

회사 명함은 없지만, 이 시간만큼은 여전히 ‘일하는 나’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요.

그 기분이 생각보다 저를 단단하게 잡아줘요.

중간중간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개요.

티 안 나는 일이지만, 이 작은 손길들이 쌓여서 우리 집 하루가 조용히 굴러가요.

예전에는 점심시간 두 시간을 제일 좋아하던 사람이었어요.

동료들이랑 맛집 찾아다니고,

후다닥 먹고 남산까지 걸어 다녀오던 사람.

사실 한국에 있을 땐 휴직을 잠깐 고민한 적도 있어요.

그때 가장 먼저 들었던 걱정이 좀 엉뚱했어요.

점심을 같이 먹을 사람이 없으면 끼니를 자주 거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거였어요.

혼자라는 게 그때는 그렇게 막막했나 봐요.

근데 지금은 혼자 삶은 달걀 하나와 사과를 먹으면서도 이상하게 덜 외로워요.

이제는 알아요.

혼자 먹는 점심이 외롭지 않으려면,

누군가가 채워주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챙겨줘야 한다는 걸요.

오후 두 시가 되면 다이어리를 펴요.

오늘 마음에 남은 문장 하나.

오늘 감사했던 일 하나.

그리고 문득 적어봐요.

“오늘도 잘하고 있는 걸까?”

답은 아직 없어요.

근데 요즘은 큰 질문 대신 작은 질문을 해요.

오늘 웃은 적은 있었는지.

오늘 마음이 조금 편했던 순간은 있었는지.

그러면 이상하게 답이 조금씩 보여요.

거창한 정답이 아니라, ‘그래도 오늘 하루, 나쁘지 않았어’ 그 정도의 작은 끄덕임이요.

요즘 저는 그 작은 끄덕임을 하나씩 모으며 살아요.

그 끄덕임이 모이면 언젠가 ‘나, 그래도 잘 지냈구나’ 하고 웃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오후 세 시.

학교 앞에서 다시 아이들을 기다려요.

그리고 저를 잠깐 쉬게 해주었던 조용한 일곱 시간도 문을 닫아요.

다시 엄마가 되고,

다시 분주한 하루가 시작돼요.

그런데 그 분주함 속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예전보다 조금 가벼워요.

근데 이제는 알아요.

누구도 박수쳐주지 않는 그 일곱 시간이,

사실은 매일 저를 다시 살게 하고 있었다는 걸요.

📝 Julia Life Note

“한때는 텅 빈 집의 고요함이 외로움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저를 돌보는 시간이 됐어요.” 엄마도, 아내도 아닌 그냥 ‘나’로 존재하는 일곱 시간. 오늘도 그 시간이 있어서 다시 내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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