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두 시의 기록 04. 경력단절과 화해하는 중

“나는 뭐하냐고요 — 그 질문 앞에서 처음으로 멈췄어요.”

처음엔 그냥 편하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집이 조용해지는 그 순간. 한국에서 매일 아침 회의 준비하고 메일 확인하던 사람이 갑자기 아무 할 일 없이 집에 혼자 남겨지는 느낌. ‘이게 바로 내가 그렇게 원하던 여유구나’ 싶었어요.

처음 몇 주는 정말 좋았어요. 커피를 여유롭게 내리고, 집을 천천히 정리하고,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그 고요함이 낯설면서도 달콤했어요. 한국에서 바쁘게 살 때 “나중에 시간이 생기면”이라고 미뤄뒀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앞에 펼쳐진 기분이었거든요.

근데 그 조용함이 쌓이면서, 예상 못 했던 게 찾아왔어요.

사색할 시간이 생기니까 — 오히려 생각이 너무 많아졌어요.

“아, 나는 경력단절이구나”

어느 날 혼자 커피를 내리면서 문득 그 단어가 떠올랐어요.

경력단절.

재무팀에서 10년 넘게 일했어요. 첫째, 둘째 낳고도 출산휴가만 쓰고 복직했어요. 육아휴직은 한 번도 제대로 써본 적이 없었어요. 일이 당연했고, 바쁜 게 일상이었고, 해야 할 일이 늘 쌓여있는 삶이었거든요.

당시엔 그게 맞는 것 같았어요. 인생 선배들이 “이 시기만 버티면 아이들은 잘 자라. 근데 나중에 쉬고 싶어도 아이들 교육비 때문에 못 그만두는 상황이 올 수 있어”라고 했고, 그 말이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미국에 오면서 육아휴직을 쓰게 됐을 때도 — 경력을 중단한 게 아니라 잠깐 쉬다 가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남은 휴직을 여기서 쓰는 것뿐이라고.

근데 오후 두 시의 조용함 속에서 혼자 앉아있다 보면, 그 감각이 조금씩 와요.

  • 직함이 없다는 것. ‘과장’, ‘차장’ 대신 ‘누구 엄마’로만 불리는 생소함.
  • 성과가 없다는 것. 오늘 내가 한 일이 숫자로 증명되지 않는 허전함.
  • 소속이 없다는 것. 조직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밀려난 듯한 어정쩡한 느낌.

14년 동안 성과로 나를 증명했던 사람이, 이제 내 하루를 증명해줄 게 없어진 것 같은 기분. 그게 경력단절이라는 단어 그대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어요. 근데 그 어정쩡한 감각 — 분명히 실재했어요.

그 질문 앞에서 처음으로 멈췄어요

아이 스포츠팀 경기가 있던 날이었어요.

경기장에서 다른 학부모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다가 — 자연스럽게 그 질문이 나왔어요.

“What do you do? 뭐 해요?”

순간 멈췄어요.

한국에 있었다면 자연스럽게 나왔을 말이에요. “회사 다녀요. 재무팀이에요.” 그 문장이 14년 동안 나를 설명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거든요. 근데 그날은 그 문장이 없었어요.

나는 지금 뭐한다고 해야 하지?

‘그냥 집에 있어요’ 라고 하기엔 뭔가 걸리고, ‘블로그 해요’ 라고 하기엔 아직 작고, ‘육아 중이에요’ 라고 하기엔 아이들이 이미 학교에 다니고 있고.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웃으며 넘겼어요.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웠어요. 그 질문이 나를 무너뜨린 게 아니에요. 나를 무너뜨린 건 — 대답이 없다는 사실 자체였어요. 14년 동안 한 번도 그 질문 앞에서 멈춰본 적이 없었거든요. 항상 답이 있었어요. 그 답이 사라진 게 이렇게 낯설 줄 몰랐어요.

열심히도 아닌 것 같아서 더 그랬어요

더 솔직하게 말하면 이거예요.

집에 있는다고 해서 매일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골프를 배우는 것도 아니고, 뭔가 새로운 걸 배우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하루하루 지나가는 느낌.

“쉬는 것도 아니고 뭔가를 하는 것도 아니고 —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주재원 커뮤니티에서 어떤 분들은 여기 와서 골프를 배웠다고, 필라테스 강사 자격증을 땄다고, 영어 회화를 엄청 늘렸다고 해요. 재무팀 출신이라 그런지, 인풋 대비 아웃풋이 없는 제 하루가 유독 초라해 보였어요. 한국에서는 바빠서 못 한다는 핑계라도 있었는데, 여기선 시간이 있는데도 뭔가를 못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더 자책이 됐어요.

그러면서 작은 루틴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커피 한 잔, 꽃 한 다발, 블로그 글 한 편. 거창하게 뭔가를 하지 않아도, 오늘 내가 살아있었다는 흔적을 남기는 것. 그게 전부여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허락을 내리는 연습.

경력단절과 화해하는 중

지금도 여전히 “화해하는 중”이에요. 완전히 편해졌다고 하면 거짓말이에요.

누군가 “뭐 해요?” 라고 물을 때 아직도 잠깐 멈추는 순간이 있어요. 그리고 솔직히 — 한국에 있는 친구들 소식을 들을 때 가끔 흔들려요. 승진했다고, 프로젝트 잘 마쳤다고. 그 소식이 기쁘면서도, 동시에 나는 지금 어디 있지? 하는 생각이 스쳐요. 이게 비교의 함정인 줄 알면서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해요. 인간이니까요.

근데 예전이랑 달라진 게 하나 있어요.

직장인의 언어: 회사라는 구조가 나를 설명해주던 시간.

나의 언어: 내가 나를 설명하는 단어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시간.

그 멈추는 순간이 두렵지 않아졌어요.

요즘은 “뭐 해요?” 라는 질문에 이렇게 말하려고 연습해요. “블로그 써요. 캘리포니아 생활 기록하고 있고, 최근엔 1인 법인 설립도 마쳤어요.” 아직 완벽하게 자연스럽진 않아요. 그래도 예전처럼 웃음으로만 넘기지 않아도 되는 답이 조금씩 생기고 있어요.

LLC를 만든 것도 그 연장선이었어요. 매출이 폭발적이지 않아도 법적 그릇을 먼저 세운 건, 아마도 재무팀 14년이 남긴 본능이었을 거예요. 구조를 먼저 잡아야 한다는 것. 경력이 사라진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살아있다는 감각이 — 그게 화해의 시작이었어요.

회사가 나를 설명해주던 시간이 끝났고, 이제는 내가 나를 설명하는 언어를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시간이에요. 그게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리는 일이더라고요.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기도 하고요.

오후 두 시를 보내고 있는 당신에게

“뭐 해요?” 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이 안 나온다면, 지금 뭔가를 열심히 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더 불편하다면 — 그 감각이 이상한 게 아니에요. 저도 그러니까요.

직함 없이 나를 설명하는 언어를 찾는 건, 생각보다 훨씬 시간이 걸리는 일이에요. 15년, 20년 동안 외부가 만들어준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는데 — 그게 한순간에 익숙해질 리 없잖아요. 저도 아직 그 답을 만들어가는 중이에요.

그 과정 자체가 사실은 꽤 용감한 일이에요. 외부가 만들어준 정체성 없이 스스로를 찾아가는 것이니까요. 지금 이 멈춤의 시간은 퇴보가 아니라, 더 단단한 ‘나’를 빚어가는 과정이에요. 우리 조금만 더 너그럽게 자신을 기다려주기로 해요.

📝 Julia Heart Note

“회사가 나를 설명해주던 시간이 끝나고, 내가 나를 설명하는 언어를 만들어야 하는 시간이 시작됐어요.”

아직 화해 중이에요. 완전히 편하지 않아요. 근데 그 멈추는 순간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아졌어요. 그게 지금 제가 얻은 가장 작고, 가장 큰 변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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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oughts on “오후 두 시의 기록 04. 경력단절과 화해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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